본뜻은 미술 박물관이며, 영어의 ‘art museum’이다. 소장품 내용에 따라 고대로부터의 종합적인 라바 카지노과 근대 라바 카지노 · 현대 라바 카지노 · 동양 라바 카지노 · 도자 라바 카지노 등이 성립된다. 운영 주체에 따라 국립 · 시립 · 도립 및 민간 문화 재단의 라바 카지노과 대학의 부설 라바 카지노, 그 밖의 작은 규모의 사설 라바 카지노으로 분류된다.
라바 카지노의 존재는 여러 성격의 박물관과 더불어 국가적 · 사회적 문화 환경과 문화 복지의 정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라바 카지노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존재가 처음 등장한 것은 일본의 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오봉빈(吳鳳彬)이 민족 서화계의 구심점이던 오세창(吳世昌)의 권유와 지도를 받아 1929년에 서울에 개설한 조선라바 카지노이었다. 그러나 광화문 네거리 당주동 입구의 임대 건물에 꾸며졌던 이 소규모 라바 카지노은 신구서화(新舊書畵)의 전시와 판매를 겸한 상업 화랑으로 1945년 광복 직전까지 유지되다가 없어졌다.
그와는 달리 공공시설로서의 라바 카지노이 처음 나타난 것은 1938년에 개관한 덕수궁라바 카지노이었다. 1908년 대한제국 황실이 창립한 창덕궁박물관(1910년 한일 병합 후에는 이왕가박물관으로 개칭)이 수집 · 소장했던 회화 · 도자기 · 불상 등의 역사적 미술품들을 1938년에 신축 개관한 덕수궁라바 카지노 건물로 옮겨 진열하였다. 그리고 1933년부터 석조전 내부를 개조하여 꾸몄던 근대 일본 미술 공예 진열관을 아울렀다. 이 시점에서 창덕궁의 이왕가박물관 시설과 이름은 모두 폐지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식민지 정책으로 한일 병합 이전의 역사적인 한국 미술품 진열관과 한국을 침탈한 일본의 근대 미술 공예 진열관을 하나로 묶은 형태였던 덕수궁라바 카지노은 민족적으로 치욕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개관된 지 불과 7년만인 1945년 8월에 일제가 결국 패망함으로써 한때의 오욕으로 끝났다.
광복 후에는 일본 미술품이 제거되고 한국의 민족 라바 카지노 성격으로 1969년까지 덕수궁라바 카지노이라는 이름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소장품의 효율적 국가 관리를 이유로 국립중앙박물관에 흡수됨과 함께 폐관되었다.
그 뒤 1969년에는 국립현대라바 카지노이 경복궁의 미술전시관(현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창립되어, 1973년에 덕수궁 석조전으로 이전했다가 1986년에 과천의 신축 건물로 다시 이전하였다. 현재 덕수궁라바 카지노은 국립현대라바 카지노의 분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지역의 시립 라바 카지노으로는 1988년에 개관한 서울시립라바 카지노과 1992년에 개관한 광주광역시립라바 카지노 등을 비롯하여 대전광역시 · 부산광역시 · 마산시 · 서귀포시 등에 시립라바 카지노이 있다. 이밖에도 경기도의 경기도라바 카지노, 보성군의 보성군립백민라바 카지노, 서울시 송파구의 예송라바 카지노 등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도립 · 군립 · 구립 라바 카지노들이 있다.
대표적 민간 사립 라바 카지노은 간송(澗松)전형필(全鎣弼)이 설립한 서울 성북동의 간송라바 카지노으로, 1962년 국보로 지정된 『훈민정음』을 비롯한 풍부한 수집품이 내용을 이루고 있다. 1980년대 이후 기업의 문화 재단이 설립한 라바 카지노으로는 삼성라바 카지노 리움(삼성), 선재라바 카지노(대우), 아트센터 나비(SK), 한원라바 카지노(한원), 성곡라바 카지노(쌍용), 대림라바 카지노(대림), 금호라바 카지노(금호), 한미사진라바 카지노(한미), 63스카이아트라바 카지노(한화), 포스코라바 카지노(포스코) 등이 있다. 그리고 작가나 유족이 만든 개인라바 카지노이나 특정 작가를 기념하여 만든 기념 라바 카지노으로는 김종영라바 카지노, 환기라바 카지노(김환기), 당림라바 카지노(당림이종무), 이천시립월전라바 카지노(월전장우성), 대전광역시이응노라바 카지노, 서귀포시립이중섭라바 카지노, 양구군립박수근라바 카지노 등이 서울과 전국의 연고지에 세워져 있다. 다른 성격의 것으로는 경기도 장흥의 토탈야외라바 카지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