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규는 원래 경기도 광주 출신으로 본래의 성은 함씨(咸氏)였다. 그러다가태조 왕건(王建)때에 국가에 크게 공헌한 대가로 왕씨(王氏) 성을 하사받은 것으로 보인다. 태조는 고려를 세운 뒤 호족세력(豪族勢力)을 통합하는 방법의 하나로 혼인정책을 추진하였는데, 그 대상은 즉위를 도와준 무장세력, 학문적 능력을 가진 문사층, 귀부해온 지방호족 및 신라 왕족과 같은 광범한 세력이었다. 그런데 왕규는 학문적 능력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던 인물인 듯하다.
937년(태조 20) 중국의 후진(後晉)에 사신으로 가서 석경당(石敬瑭)의 등극을 축하하였고, 태조가 죽을 무렵 곁을 지키는 등 태조의 측근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태조가 승하하고 혜종이 즉위하자 왕규는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소광주원부인 소생]을 왕위에 추대하기 위하여혜종(惠宗)을 시해하고자 하였고, 혜종이 죽은 뒤에는 태조의 왕위계승 다툼에 휘말려 죽음을 당하였다.
그 와중에서 왕규의 일당 3백여 명이 같이 죽임을 당하였는데, 왕규의 딸인 소광주원부인이 무사하였을지는 의문이다. 생존하여 있었다 하더라도 반역자의 딸은 왕실에서 축출되는 예가 많아 왕비의 자리에서 밀려났을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