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와집』은 조선 후기 재야 문인 하진현의 시문을 편찬한 문집이다. 그는 생애 전반에 걸쳐 시를 지었고, 산문 또한 편지, 찬, 발문, 등을 보면, 친족과 사우들의 속에서 이루어졌다. 저자 사후 1964년 6세손 하병선(河炳璇)이 편집, 간행하였다.
용와(容窩) 하진현(河晉賢)의 자는 사중(師仲),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부친은 함와(涵窩) 하이태(河以泰)이다. 집안 가학은 송정(松亭)하수일(河受一)이 남명 조식을 사숙(私淑)하면서 내복재(來復齋) 하항(河沆), 지명당(知命堂) 하세응(河世應), 태와(台窩) 하필청(河必淸)까지 이어졌다. 하진현도 종형인 예암 하우현(河愚顯)을 따라 글을 읽다가, 부친의 명으로 하필청의 문인인 남계(南溪) 이갑룡(李甲龍, 1734∽1799)의 문하에 들어가 정식으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는 글에 있어서는 육경을 바탕으로 하되 제자 백가의 내용을 두루 수용하였고, 힘들여 지어낸 태가 없이 평담하고도 충화(沖和)한 기세가 풍부하였으며, 입에서 나오는 즉시 문장을 이루어 당시 여러 현인들이 그의 문재를 칭송할 정도로 작문 실력이 출중했다고 한다. 여러 차례향시(鄕試)에 입격하였지만 회시(會試)에서 낙방한 뒤로는과거를 단념하고 평생 재야에서 학문하였다. 그는 입재정종로(鄭宗魯), 정재유치명(柳致明)등 상주 지역 인사들과 특히 친분이 두터웠으며, 그 외 남고(南皐)이지용(李志容), 오연(梧淵) 김면운(金冕運), 남강(南岡) 조득우(趙得愚), 월촌(月村) 하홍달(河達弘) 등과 왕래하며 가르침을 주고 받았다. 만년에 사산초당(士山草堂)을 짓고 덕을 용납하는 큰 사람이 되고자 학문에 정진하였다.
종증손 하의진(河義鎭)이 유고를 정리하고 1892년(고종 29) 현손 하영두(河泳斗)의 유사를 썼다. 1964년 6세손 하병선(河炳璇)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1-2는 시(詩)인데 모두 236제 400여 수이다. 권1에는 1813년(순조 13)부터 1836년까지, 권2에는 1836년(헌종 2)부터 1846년(헌종 12)까지 지은 한시가 수록되어 있다. 1827년(순조 27) 용와의 나이 52세를 전후하여 남긴 시편에는 그의 충절과 절의를 엿볼 수 있다. 특히남한산성의 현절사(顯節祠)에 대한 제영이나신유한(申維翰)의 촉석루 시에 대해 차운한 작품을 보면, 그의 나라에 대한 충심을 확인할 수 있다. 1830년 즈음에는 안의(安義)에 있는 사락정(四樂亭), 거창의 수승대(搜勝臺),모리재(某里齋), 갈계촌(葛溪村), 함안의무진정(無盡亭)등 인근의 여러 유적을 탐방하며 선유들의 절개와 의기 등을 몸소 체험했다. 이곳들은 퇴계이황(李滉), 갈천(葛川)임훈(林薰), 첨모당(瞻慕堂) 임예(林芸), 동계(桐溪)정온(鄭蘊)등과 관련된 곳으로, 사락정과 수승대를 거닐며 이황의 자취를 더듬는가 하면, 모리재에서는 정온의 흔적을 찾고, 갈계촌에서는 임훈과 임운 형제를 기억하는 등 마주한 공간과 그곳에서 떠오르는 인물을 싯구에 옮겼다. 또한 61세가 되던 1836년에 특히 집중적으로 다작하였다. 제목에 드러난 제영 대상 혹은 공간을 살펴보면, 낙수암, 수선당, 독산,대각서원, 쌍계사, 금산 등 진주를 중심으로 작시하였다는 점, 그리고 차운시와 만시의 다작을 통해 주변인과의 교유에 적극적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권3은 서(書) 3편, 잡저(雜著) 10편이다. 편지는 유치명(柳致明), 조원석(趙元錫), 성용주(成龍柱)에게 보냈다. 유치명에게는 선조 문집 간행을 알리는 내용이고 조원석에게는 군인들에게 봉급을 제대로 주지 않아 민가에서 곡식을 빼앗아 가고 심지어 살인까지 하는 일이 있으니 시정하도록 당부한 내용이다. 잡저에는 사단 중 시비지심에 관하여 논한 「사단시비설(四端是非說)」, 한고조(漢高祖) · 장량(張良) · 한신(韓信) 3인을 논한 「삼로동공론(三老董公論)」, 「진정표(陳情表)」와 「조주한문공묘비(潮州韓文公廟碑)」 등을 읽고 난 소감을 적은 「독진정표(讀陳情表)」, 「독조주묘비(讀潮州廟碑)」 등이 있다.
권4에는 찬(贊) 3편,발(跋)14편, 기문(記文) 1편,상량문(上樑文)1편, 축제문(祝祭文) 13편, 묘명(墓銘) 1편,행장(行狀)2편, 유사(遺事) 13편, 부록(附錄)이 있다. 하진현은 찬, 발문, 유사 등을 살펴보면 선대의 문집과 유사를 후대에 남기는 데 마음을 쏟았다. 시조 시랑공 하공진(河拱辰)을 찬양한 「시랑공유사후찬언(侍郞公遺事後贊言)」, 호정(浩亭)하륜(河崙), 환성재(喚醒齋) 하락(河洛), 내복재(來復齋) 하항(河沆), 역헌(櫟軒) 하진달(河鎭達) 등의 문집에 대해 「호정선생유집발(浩亭先生遺集跋)」, 「환성재선생문집발(喚醒齋先生文集跋)」, 「내복재선생문집보유발(來復齋先生文集褓遺跋)」, 「서역헌처사하공유기후(書櫟軒處士河公遺起後)」 등의 발문을 남겼다. 유사에서도 고조 하세희(河世熙), 지명당(知命堂) 하세응(河世應), 태와(台窩) 하필청(河必淸) 등에 대해 「고왕고석계공유사(高王考石溪公遺事)」, 「지명당공유사(知命堂公遺事)」, 「태와공유사(台窩公遺事)」 등을 남겼다. 문과 합격자 명단인 연계안(蓮桂案)을 보관하는 연계재(蓮桂齋)에 대한 기문과 상량문을 각각 1편씩 지었다. 부록에는 하진현 사후 친족과 벗들이 남긴 만시, 행장, 유사, 묘지명 등이다.
용와 하진현은 출사의 뜻을 접고 평생 고향에서 활동한 재야 지식인으로서, 선대의 가학을 계승하는 바탕 위에 주변 지식인들과 교유의 폭을 넓히며 자신의 학문에 침잠하였다. 그의 『용와집』은 그의 가학과 학문적 성향 및 교유를 두루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