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당시 부산진일신여학교(釜山鎭日新女學校: 현 동래여자중고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였다.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3월 2, 3일경 부산에도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배부되기 시작하였다.
평소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주경애로부터 민족적인 정신감화를 많이 받아왔다. 이에 3월 10일경 새벽 기숙사 주변에 뿌려진 격문의 전단을 먼저 발견한 학생이 주경애에게 달려가 보이자, 이 전단은 서울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라는 신호임을 알리고 은밀히 부산상업학교(釜山商業學校)에 연락을 취하는 한편, 동료교사들을 규합하여 본교에서도 결행할 것을 협의한 뒤 이 사실을 고등과 학생들에게 알렸다.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고등과 학생 11명은 밤을 기다렸다가 벽장속에 숨어서 치마의 옥색물을 탈색하여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1일 김응수(金應守) 외 고등과 학생 등은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기숙사를 뛰쳐나와 좌천동 일대를 누비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거리의 대중들도 호응하여 학생들과 합류한 시위군중이 수백명이 넘었다. 이 부산 좌천동의 만세시위는 곧 주경애가 중심체가 되어 이루어진 여성독립운동의 한 장(場)이었다. 이들은 곧 체포되어 학생 11명은 모두 6개월의 언도를 받았고, 주경애·박신연(朴信淵)은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