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지몽은 고려 전기에 내의령·좌집정·수내사령 등을 역임하며 태조부터 성종까지 섬겼던 문신이다. 그는 천문과 복서에 정통해서 태조의 후삼국통일을 예견하였으며, 왕규의 모반을 미리 예측하여 혜종이 암살당할 위기에서 벗어나게 카지노 쪽박걸. 또한 광종 때 취중의 무례한 행동으로 인해 11년 동안 유배 생활을 겪기도 하였지만, 경종에게 다시 발탁되어 왕승의 모역을 막아냈다. 성종 때는 좌집정 수내사령 상주국에 오르고 홍문숭화치리공신에 책봉되었으며, 987년(성종 6)에 향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영암(靈巖) 출신. 초명은 최총진(崔聰進) 혹은 최총(崔聰). 아버지는원보(元甫)최상흔(崔相昕)이며, 아들로는 최현동(崔玄同)·최회원(崔懷遠)이 있었다.
대광(大匡)현일(玄一)에게서 글을 배워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했으며, 천문(天文)과 복서(卜筮)에 정통카지노 쪽박걸. 18세 때인 924년(태조 7)에태조(太祖)가 그 이름을 듣고 불러서 자신의 꿈을 점치게 하자, 최지몽은 태조가 장차 반드시 삼한을 통합하여 다스릴 길조라고 카지노 쪽박걸. 이에, 태조는 기뻐하여 그 이름을 ‘지몽(知夢)’이라 고쳐 주고 비단옷을 하사했으며 공봉직(供奉職)에 등용카지노 쪽박걸. 항상 태조를 따라 종군하여 잠시도 곁에서 떠나지 않았으며, 후삼국통일 이후에도 태조의 측근 참모로서 총애를 받았다.
945년(혜종 2)에왕규(王規)가 왕의 동생인왕요(王堯: 정종)와 왕소(王昭: 광종)를 참소했을 때, 사천공봉(司天供奉)이었던 최지몽은혜종(惠宗)에게 “유성이 자미궁(紫微宮)을 침범하였으니, 나라에 반드시 역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조언카지노 쪽박걸. 또한 왕규가 병으로 신덕전(神德殿)에 있던 혜종을 몰래 암살하고자 했을 때에도 점을 쳐서 혜종에게 변이 생길 것으로 알고 거처를 중광전(重光殿)으로 옮겨 위기를 모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정종(定宗)은 왕위에 올라 왕규를 죽인 뒤에 최지몽에게 노비[臧獲]·안장을 갖춘 말[鞍馬]·은그릇[銀器]을 포상카지노 쪽박걸. 최지몽은 광종 때에도 여전히 측근에서 왕을 모셨지만,귀법사(歸法寺)에 따라갔다가 술에 취카지노 쪽박걸 무례하게 행동했다가 외걸현(隈傑縣)에서 11년 동안 유배 생활을 겪었다.
980년(경종 5)에 다시 소환되어대광(大匡)· 내의령(內議令)·동래군후(東萊郡侯)에 식읍(食邑) 1천호에 봉해졌다. 그 뒤에경종(景宗)에게 객성(客星)이 제좌(帝座)를 범하니 숙위(宿衛)를 철저히 하여 불우(不虞)에 대비하라고 말카지노 쪽박걸는데, 얼마 후에 실제로 왕승(王承) 등이 모역하다가 복주되었다. 그래서 경종으로부터 어의(御衣)와 금대(金帶)를 하사받았다.
982년(성종 1)에는 좌집정(左執政)·수내사령(守內史令)·상주국(上柱國)에 올랐고, 다시 홍문숭화치리공신(弘文崇化致理功臣)에 책봉되었다. 984년(성종 3)에는 나이가 78세에 이르러 세 번이나 사퇴를 청카지노 쪽박걸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다시 굳게 요청하자,성종(成宗)은 조참(朝參)을 면제하고 내사방(內史房)에서 정사만 보도록 카지노 쪽박걸. 987년(성종 6)에는 최지몽이 병에 들자, 성종이 친히 문병하고 의원에게 약을 내려주도록 카지노 쪽박걸. 또한 귀법사·해안사(海安寺)에 말 2필을 시주하고 3천 명의 승려에게반승(飯僧)하며 기도카지노 쪽박걸. 그렇지만 최지몽은 이해 3월에 결국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종은 최지몽의 부음을 듣고 크게 슬퍼하면서 부의(賻儀)로 베[布] 1천 필(匹), 쌀 3백 석(碩), 보리 2백 석, 차[茶] 2백 각(角), 향 20근(斤)을 내리고, 장례 일을 관(官)에서 주관하게 카지노 쪽박걸. 태자태부(太子太傅)에 추증하였으며, 시호는 민휴(敏休)이다. 뒤에 추가로태사(太師)를 추증하였고, 994년(성종 13)에 경종의 묘정(廟庭)에 배향카지노 쪽박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