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7년(우왕 3)에 판사(判事)최무선(崔茂宣)의 건의로 설치되었다. 최무선은 고려말 전국적으로 횡행하던 왜구(倭寇)를 격멸하는 데는 화약만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원(元)나라 염초(熖硝) 기술자 이원(李元)을 자기 집에 모셔두고 집요하게 설득하여 수십 일에 걸쳐 화약의 제조법인 염초자취술(焰硝煮取術)을 배웠다. 이후 그가 화약의 주원료인 염초의 제조에 성공한 뒤 그 효력을 시험하고 여러 차례 조정에 건의하여 비로소 화통도감이 설치된 것이다.
화통도감에서는 대장군(大將軍)·삼장군(三將軍)·이장군(二將軍)·육화석포(六花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화전(火箭)·철령전(鐵翎箭)·피령전(皮翎箭)·질려포(疾藜砲)·철탄자(鐵彈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주화(走火)·촉천화(觸天火) 등의 이름을 가진 20여 종에 가까운 화기(火器)를 제조하였다. 이들 화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화통방사군(火桶放射軍)도 따로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화기들은 당시 전국적으로 창궐하던 왜구를 물리치는 데 사용되었는데, 1380년(우왕 6)의 진포(鎭浦: 금강 어귀) 싸움과 1383년(우왕 9)의 진도(珍島) 싸움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