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이름과 자는 자춘(子春)이다.도조(度祖: 李椿)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오동백호(斡東百戶) 박광(朴光)의 딸이다. 부인은 최한기(崔閑奇)의 딸카지노 노말C758;카지노이다.
1394년(태조 3)태조의 4대조를 추존할 때 환왕(桓王)으로,태종때 다시 환조로 추존되었다. 조카 이교주(李咬住)가 장성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형의천호(千戶)관직을 이어받았으나, 후에 독자적인 체제를 굳혔다. 그는 원나라의 후원에 힘입어 부원(附元)세력인 조씨(趙氏: 이복동생의 外家)와의 대결에서 승리하고 그 직책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그 뒤 원나라의 정책으로 타격을 입게 되자 차츰 원나라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당시 원나라는 이른바 삼성조마호계(三省照磨戶計)라 하여 중서성(中書省) · 요양성(遼陽省) ·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 등 3성의 원주민과 이주민을 구분해 호적을 작성하였다. 그 의도는 원주민을 우대하고 국외의 이주자를 데려오는 것이었다. 이는 이주민을 세력 기반으로 구축하고 있던 그에게 치명적인 타격이 되었다.
한편,공민왕은 원명 교체기에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반원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는 동북면의카지노 미국C30D;카지노와 연결된 친원 기씨(奇氏)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 지역에서 유이민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한 이자춘을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꼈다. 이자춘도 대대로 구축해 온 세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1355년(공민왕 4) 공민왕을 찾아 복종할 뜻을 비치자, 공민왕은 그에게 소부윤(少府尹)을 제수하였다. 이듬해 그는유인우(柳仁雨)와 함께 동북면을 협공해 쉽사리 이 지역을 점령하고 99년 만에 회수하였다. 이후 그는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가세해 뿌리 깊게 대립했던 조씨 세력을 제거했다.
또한, 이 때의 전공으로 대중대부사복경(大中大夫司僕卿)이 되어 저택을 하사받고 오랫동안 그의 기반이었던 동북면을 떠나 개경에 머물게 되었다. 개경에 머문 지 1년 만에 동북면에 돌아가려 하자, 그 곳의 토착 기반을 이용해 공민왕을 배반할 우려가 있다며 조정의 신하들이 반대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그가 아니면 동북면을 안정시킬 수 없다고 판단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해 다시 영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가 동북면에 이르러 4월에 병사함으로써 조정 신하들의 염려는 기우로 끝났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 이성계는 통의대부 금오위상장군 동북면상만호(通議大夫金吾衛上將軍東北面上萬戶)가 되어 약관으로 정3품의 중앙무관직과 선조의 기반인 상만호의 두 가지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는 이성계가 동북면의 토착기반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을 의미한다. 나아가 조선왕조 건국의 세력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능은 정릉(定陵)으로, 함흥 동쪽 귀주동(歸州洞)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