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의 소위 ‘문화통치기’ 하에서 조선총독부의 후원 아래 일선융화(日鮮融和)와 노자협조(勞資協調)를 표방하며 조직된 친일단체의 연합체이다.
국민협회(國民協會)·조선소작인상조회(朝鮮小作人相助會)·유민회(維民會)·노동상애회(勞動相愛會)·조선경제회(朝鮮經濟會)·교풍회(矯風會)·동광회(同光會)·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청림교(靑林敎)·대정친목회(大正親睦會)·동민회(同民會) 등 11개 단체가 연합하여, ① 관민일치, 시정개선, ② 대동단결, 사상선도, ③ 노자협조, 생활안정의 강령을 내걸고 출범하였다(1924년 3월 25일, 남산정 경성호텔).
각파유지연맹이 발족하자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그 친일성과 어용성을 강하게 비판하였고, 이에 격분한 각파유지연맹 측에서는 동년 4월 2일,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 양인을 요정 식도원(食道園)으로 불러내어 회유를 거듭하던 끝에, 박춘금(朴春琴)·이희간(李喜侃)·김명준(金明濬) 등이 앞장서서 구타·협박을 자행하였다.
이것은 곧바로 사회적 분노를 불러일으켜, 동년 4월 9일안재홍(安在鴻) 외 40여인은 각파유지연맹을 응징한다는 목적 하에 대규모 민중대회를 조직하였으나, 결국 경찰에 의해 저지되고 말았다.
각파유지연맹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자, 교풍회 대표 유문환(劉文煥)이 탈퇴성명을 신문에 발표하였고, 조선경제회는 참가대표 이승현(李升鉉)·박해원(朴海遠)을 징계·제명하는 등, 내부로부터 와해되어 사실상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