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3·1운동의 거센 물결이 일어나자 간도 지방에서도 이에 호응,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간도의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3월 12일서간도 지방의 중심지인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와 통화현 금두(通化縣金斗)에서 독립선언축하회를 개최하고, 만세시위운동을 벌인 데서 비롯되었다. 북간도 지방의 만세운동은 다음날인 3월 13일, 이 지방의 중심지이고 많은 카지노 가입머니인이 거주하는 용정(龍井)에서 처음 일어났다.
이날 정오, 천주교회당의 종소리를 신호로 용정 북쪽의 서전대야(瑞甸大野)에는 1만 명 가량의 카지노 가입머니인이 모여들었다. 용정의 카지노 가입머니인은 거의 다 참석했고, 부근 1백리 안의 동포가 거의 다 모여들어 독립축하회 식장의 넓은 뜰을 꽉 메웠다.
독립축하식은 김영학(金永學)의 ‘독립선언포고문’의 낭독으로 시작되었고, 축하회를 마친 군중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만세시위행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계획을 사전에 탐지한 일본은 중국 관헌과 교섭하여 맹부덕(孟富德)이 거느린 중국 군대로 하여금 독립만세운동을 저지하게 했다. 군중의 기세를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맹부덕은 선두에 있던 대한독립기를 빼앗고 발포 명령을 내려 무차별 사격을 가해, 18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30여 명이 부상한 채 해산되었다.
그 후에도 이 지역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계속되었으며, 3월 17일의 용정, 20일의 훈춘(琿春), 26일의 백초구(百草溝), 31일의 고집지(高集地)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이어졌다. 이러한 저항은 4월 중순까지 크고 작은 만세운동으로 지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