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회지(晦之). 스스로 몽암거사(夢巖居士)라 하였다. 아버지는 한림학사 권위(權韙)이다. 어머니는 잡직서령(雜織署令) 이영(李榮)의 딸이다.
일찍이 숨어 살 뜻을 가졌으나, 아버지의 강권에 의해 장단현위(長湍縣尉)로 벼슬을 시작하여, 1254년(고종 41) 문하녹사(門下錄事)로 나갔다가 재상 유경(柳璥)의 권유로 과거시험을 보아 급제하였다.
합문지후(閤門祗候)를 거쳐 예산(禮山)·승주(昇州)·맹산(孟山)·개천(价川) 등의 부사를 역임한 이래 중외에 기용되었다. 뒤에 동경(東京)을 유수(留守)하면서 중앙에 바치는 능라(綾羅)를 지나치게 거두어 저장하였던 갑방(甲坊)을 철폐해 지방민의 부담을 경감하였다. 또한 백성의 조세를 훔치는 사호(司戶)가 있자 아문에서 격살해 다시는 범법하지 못하게 하였다.
3도의 안찰사를 역임했는데, 경상도안찰사 때에는 진주부사 백현석(白玄錫)과 보주부사(甫州副使) 장전(張悛)의 부정을 탄핵하였다. 국자좨주(國子祭酒)·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옮겼을 때에, 진주지방관 최참(崔旵)이 바친 능라가 조잡해 왕이 읍리(邑吏)를 고문하게 하였더니, “권단이 안렴사가 되어 실값을 감한 까닭”이라 대답해 최참과 함께 파직되었으나, 백성의 폐단을 제거했다는 공으로 복직되었다.
1272년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원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279년(충렬왕 5)에는 충청도도지휘사(忠淸道都指揮使)가 되어 전란 중의 산적한 문제를 처리하였고, 당시 미결 중이던 농민의 송사를 맡은 7인 중의 하나였다. 1284년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로서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 김주정(金周鼎)과 함께 과거를 주관해, 권한공(權漢功)·김원상(金元祥)·최성지(崔誠之)·채홍철(蔡洪哲)·백이정(白頤正) 등 명사를 배출하였다. 1287년 밀직학사(密直學士)에 임명되었다.
성품이 남에게 영합하지 않아 3품에 제수된 지 10년이 넘어서야 승지에 제수되고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랐다. 그러나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해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로서 치사(致仕)하고, 뒤에 다시 찬성사(贊成事)로 치사하였다.
권단은 성품이 청렴, 겸손하고 불교를 독신하여 만년에는 선흥사(禪興寺)에서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문청(文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