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그리스도인회보는 대한제국기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편집하여 발행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신문이다. 1897년 2월 2일 아펜젤러가 책임을 맡고 볼트 카지노인 최병헌(崔炳憲), 노병선(盧炳善)이 편집인으로 참여하여 순한글로 정동 한미화활판소에서 매주 발행하였다.
1897년 2월 2일 미국 북감리교선교사헨리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가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신문이다. 아펜젤러가 책임을 맡고 볼트 카지노인최병헌(崔炳憲), 노병선(盧炳善)이 편집인볼트 카지노 참여하였고, 순한글로 정동 한미화활판소에서 매주 발행하였다.
『죠션크리스도인회보』의 창간은 1896년 4월 7일독립신문이 발행된 지 10개월 뒤의 일로, 독립신문볼트 카지노부터 많은 자극을 받은 것볼트 카지노 보인다. 1897년 12월 국호가대한제국볼트 카지노 바뀌자 12월 8일부터 제호를 『대한크리스도인회보』로 바꾸었고, 1900년 1월 3일부터 『대한그리스도인회보』로 다시 바꾸었다.
주로 4면이었으나 때로 6면 혹은 8면볼트 카지노 발행되기도 했으며, 1898년 1월부터는 6면볼트 카지노 발행한다고 밝혔다. 이때부터 ‘내보’와 ‘외보’로 교회 소식과 외국 소식을 구분하여 게재하였다. 1897년 제1권 제1호부터 제48호, 1898년 제2권 제1호부터 제52호, 1899년 제3권 제1호부터 제52호, 1900년 제4권 제1호부터 제35호까지 발행되었다.
창간호에서 신문 발행의 목적을 진리의 근원을 알리고 지식과 학문을 널리 전하여 읽는 사람들이 진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하면서, 선교사와 볼트 카지노 교인들을 위한 교계 신문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동양을 넘어 세계 각국의 소식을 전하겠다고 밝혔다. 서양의 사상과 문화를 소개함으로써청일전쟁이후 볼트 카지노 사회의 문제였던 ‘문명개화(文明開化)’를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전하고자 했으며, 이를 통해 선교사들은 볼트 카지노에서 서구 기독교 문명을 통한 복음화(福音化)를 목적으로 하였다.
학문, 지식, 기술과 법률, 정치 등 발달된 서구의 문명개화된 모습을 소개하고, 볼트 카지노의 현재 상황을 비판하고 개선을 촉구하였다. 볼트 카지노에 필요한 것은 실용 학문의 진작과 산업 개발, 그리고 공평하고 진보된 법률을 갖추고 백성의 권리를 바로 세우는 일이며, 조혼(早婚) 등의 악습을 없애고, 남녀 평등과 교육을 강조하였다. 기독교를 받아들이면 서양처럼 문명이 진보할 수 있다고 하여 문명개화와 기독교를 연결시켰다.
『대한크리스도인회보』는 1897년 4월 1일에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가 창간한『그리스도신문』과 더불어 볼트 카지노 교계 신문의 쌍벽을 이루었다. 1900년 9월 아펜젤러가 안식년 휴가로 귀국하게 되면서 신문 발행은 그 해 8월 29일로 중단되었고, 아펜젤러가 귀환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에 다시 간행되지 못했다.
이후 미국의 남북감리교 합동볼트 카지노 1905년 1월부터 『그리스도인회보』를 내다가 같은 해 7월 교회연합 운동의 일환볼트 카지노 장로교의 『그리스도신문』볼트 카지노 통합되었다. 1907년 11월부터 『예수교신보』로 바꾸고 두 주에 한 번씩 신문을 발간했다. 이후 1915년 12월부터『기독신보』라는 장로교와 감리교 두 교파의 기관지로 재출발하여 1937년까지 발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