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회운동은 초기 우리나라 교회의 부흥과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선교사인 언더우드(Underwood, H. G, 元杜尤)는 1890년 자기 집 사랑방에 7명의 교인을 모아 놓고 성경 공부를 시작하면서 이 모임을 사경반(査經班)이라고 불렀다. 같은 해 6월 우리나라 주재 선교사회에서는 중국에서 선교 사업을 하고 있던 네비우스(Nevius, J. L.)를 초청하여 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그 결과 채택한 ‘선교 사업방안’에서 탠 카지노인 스스로가 성경을 공부하는 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있던 교회들은 성경 공부에 열중하게 되었고, 각 교회 또는 선교지구를 중심으로 각 지방에서 광범위하게 사경운동이 전개되었다. 1910∼1929년까지 약 20년간 연 129만 2000명이 참석하였는데, 이는 연평균 6만 4000명이 된다.
사경회에서 강의된 주요 과목은 4복음서, 예수의 생애, 바울서신, 교리문답, 주기도문, 십계명, 사도신경 등이었고, 응용과목으로 주일학교 교수법 · 경영법 · 기도법 · 개인 전도법 · 상담 · 회의법 등이 있었으며, 토의시간도 있었다. 여전도회 사경회에서는 아동교육 · 건강위생법 · 새 생활운동 등 실제적인 과정도 배려되어 있었다.
집회시간은 새벽 기도회부터 시작하여 오전에는 성경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반을 나누어 일반상식 과목을 다루었으며, 그 다음에는 모두가 흩어져 축호전도(逐戶傳道)와 노방전도(路傍傳道)를 하게 하였다. 그 뒤 이것이 부흥사경회로 발전하여 집회를 통한 심령의 체험과 영력을 얻는 계기가 되어 부흥운동의 기틀이 되기도 하였다.
사경회가 지닌 가장 큰 구실은 성경 공부를 통한 신앙훈련의 과정으로, 체험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지혜와 능력을 얻게 하는 데 있었다. 그 뒤 일제의 압박에 의해 점차 사경회운동이 위축되고 심령부흥회와 같은 부흥운동으로 변모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