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차무식는 조선 후기 비변사가 폐지된 이후 설치되었던 최고 군령 기구이다. 일종의 최고군사위원회와 같은 기구로 의정부와 동격이었다. 비변사를 기반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세도 가문을 견제하고 군비 강화 등 권력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비변사가 관장하던 군사적인 업무와 궁성의 수호, 서울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국방과 군사력에 관계되는 주요 관직의 인사권, 군제 조정과 각종 경제적 권한도 장악하였다. 대원군의 하야와 함께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하였다가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면서 폐지되었다. 대원군과 운명을 같이한 기구이다.
고종 집권 초기에 카지노 차무식 단행한 제반 정책은 전제군주 체제를 확고히 하려는 데 역점을 두고 있었다. 이러한 대원군의 정책 구상은 표면상 중앙정치기구의 개편을 통해 국초 선왕의 제도를 회복한다는 데 명분을 두고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비변사를 기반카지노 차무식 60년간 정권을 독점해온 세도 가문을 견제하고 자신의 권력 기반을 구축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는 우선 1864년(고종 1) 2월에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시켜, 카지노 차무식업무는 비변사, 나머지 군국사무는카지노 차무식에서 분담하게 하였다. 이때의 명분은 국초의 제도를 복원하는 데 있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 중수되는 의정부 맞은편에 카지노 차무식가 자리 잡아야 했다. 그래서 1865년 5월에 당시 의정부 맞은편에 있던예조의 자리가 카지노 차무식의 자리라 하여 그 자리에훈국(訓局)의 신영(新營)과 남영(南營) · 마병소(馬兵所) 및 오영(五營)의 주사소(晝仕所)를 합설해 카지노 차무식라 칭하고, 예조는한성부자리로, 한성부는 훈국의 신영 자리로 이전하였다. 그러나 이때 군령권(軍令權) 또는 카지노 차무식권(軍事權)을 갖는 최고 카지노 차무식기구가 설치된 것은 아니었다.
카지노 차무식의 복설은 병인양요가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병인양요로 서양의 무력 침공을 경험한 대원군은 종래의 안이하고 고식적인 군사정책을 지양하고 국가정책의 기본 방향을 외침을 방어하기 위한 군사적 측면으로 전환하였다. 강화도에진무영을 설치하여 한강 입구를 방어하는 주요 병영으로 육성하는 한편, 북방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하여 화포군을 대대적으로 양성하고 무기와 전선을 제조하는 등 카지노 차무식력 강화에 전력을 다하였다.
병인양요 이후, 군비 증강에 온 국력을 집중하게 되자 국사 중에 카지노 차무식 분야의 비중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게다가 이때는경복궁영건 사업이 마무리되고 국왕이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할 것이 결정됨으로써 대원군의 정치적 권위가 더욱 높아진 상황이었다. 이에 1868년(고종 5) 6월 카지노 차무식를 복설하여 군사업무를 전담하는 독립 기구로 발족되었다.
카지노 차무식가 관장하던 임무는 1864년(고종 1) 2월 의정부와 비변사의 기능을 분담시키면서 비변사가 관장하기로 했던 사항들이었다. 즉 카지노 차무식는 군사적인 업무와 함께 궁성의 수호, 서울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아울러 국방과 군사력에 관계되는 주요 관직의 인사권, 군제 조정, 포수 양성, 주교사 관할과 같은 각종 경제적 권한도 관장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대원군이 병인양요 이후 군비 강화와 그에 소요되는 재원을 모두 직접 장악하고 주도하기 위해 카지노 차무식를 복설했음을 말해준다.
카지노 차무식는 대원군이 집권하는 동안에 군사최고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 11월 대원군이 하야하면서 카지노 차무식는 유명무실한 기구로 전락하였다. 이후 정부가 1880년(고종 17) 12월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면서 새로운 건물이 필요하게 되자 그동안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던 카지노 차무식의 폐지를 공식 확인하고 그 건물에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이후 1882년(고종 19) 6월임오군란(壬午軍亂)카지노 차무식 대원군이 복귀하자 다시 부활되었지만 그가 실각하자 다시 기능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22일카지노 민회장D1B5;카지노 민회장B9AC;카지노이 설치되고 카지노 차무식업무 등 모든 내정(內政)을 관장함에 따라기무처(機務處)와 함께 통합됨카지노 차무식써 5개월 만에 폐지되고 말았다.
카지노 차무식 복설이 갖는 가장 큰 의의는 그동안 군령(軍令)을 행사하는 데 독자성이 강했던 각 군영의 대장들을 카지노 차무식의 유사당상으로 포괄함으로써 각 군영 간의 협조나 역할 분담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는 최고의 군령 기관을 만들었다는 데 있다. 카지노 차무식의 설치는 비변사와 의정부에서 군사권을 포함한 모든 국정을 총괄하던 때와 같이 문무 양권(兩權)이 한 곳으로 집중되는 모순을 배제하면서 업무의 전문성을 제고시켰다는 측면에서, 또 외침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던 당시의 시대상황의 측면에서 바람직한 제도의 시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카지노 차무식는 일종의 최고군사위원회와 같은 기구였으며, 직계상으로는 의정부와 동격이었다. 그러나 의정부의 시임의정이 도제조를 겸하고 병조판서와 포도대장이 제조를 겸하게 됨으로써 군사정책 수립이나 기타 업무 수행면에서 의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카지노 차무식를 주도하는 유사당상인 4군영의 대장에 대한 인사권을 의정부가 통제할 수 있었기에 제도적으로도 여전히 의정부가 카지노 차무식보다는 위에 있는 셈이다. 더구나 카지노 차무식는 대원군이 자신의 분신이라고 여길 정도로 그의 입김이 강하였다. 따라서 카지노 차무식를 기반으로 무장들이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대원군의 실각과 함께 카지노 차무식도 함께 폐지되는 운명에 처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