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에 따르면 유성은이찬(伊湌)으로, 신라 제36대혜공왕(惠恭王, 재위: 765779)의 원비(元妃)인신보왕후(新寶王后)의 아버지이다. 그런데 혜공왕의 선비(先妃)에 대해 『삼국유사』에서는 위정(魏正) 각간(角干)의 딸인 신보왕후로 나온다. 이에 대해 유성과 위정은 서로 같은 인물을 표기한 것으로 보고,경덕왕(景德王, 재위: 742765) 초에중시(中侍)에 임명된유정(惟正)과도 동일인으로 파악한다. 다만 유정은 혜공왕이 그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였을 때 중시에서 퇴임한 이후 약 20여 년이 지났을 때라는 점에서 유성 및 위정과 동일인으로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혜공왕에게는 두 명의 왕비가 있었다. 유성의 딸과 함께 이찬 김장(金璋)의 딸〔(『삼국유사』에는 각간(角干) 김장(金將)의 딸〕) 창창부인(昌昌夫人)이 왕비가 되었는데, 이들의 혼인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첫 번째 왕비는 혜공왕의 모후인만월부인(滿月夫人)에 의한 섭정기, 두 번째 왕비는 혜공왕 7년(771) 무렵부터의 친정기(親政期)로 보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유성은 만월부인의 섭정을 도우며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던 지지 세력이었을 것이다. 아울러 만월부인 섭정기에 실권을 쥐고 있던김옹(金邕)이 친당적(親唐的)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점에서 유성 역시 이에 동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혜공왕은 친정을 시작하며 만월부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새로운 세력의 두 번째 왕비를 받아들였다. 선비(先妃)로 칭해진 경우는 출궁을 당한 사례가 대부분이므로 이때에 신보왕후는 출궁 당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새로운 왕비의 세력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데, 오히려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기존 귀족과는 구별되는 세력과 혼인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혜공왕의 행보에 대해 기존 귀족들의 반발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혜공왕 13년(777) 상대등(上大等)이었던 김양상(金良相)이 시정(時政)에 대해 극론(極論)하였다는 점도 기존 세력들을 배제한 혜공왕의 두 번째 혼인에 대한 반발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