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무길(全武吉)은 일제강점기에 「미로」, 「소생」, 「허영녀의 독백」, 「무한애」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자 기자, 잡지 편집자이다. 1905년 황해도 재령 출생으로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도쿄[東京]의 도요대학[東洋大學]에서 수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아일보사, 조선일보사 기자로 일했으며, 『대조』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설움의 빛』을 시작으로 1949년까지 20여 편의 소설을 남겼다. 계급의식에 기초한 사회고발적 성격이 강한 작품을 다수 썼으며, 때문에 동반자 작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전무길은휘문고등보통학교졸업 후황해도안악으로 낙향하여 1923년 12월부터동아일보사 안악 지국 기자로 활동한다. 1924년 전후로 일정 기간 도쿄의 도요대학[東洋大學]에서 수학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다시 안악의 여러 사회단체에서 활동하던 중 1926년 학생들의 모표(帽標)가 불온하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일어난 ‘명륜강습소 사건’에 연루되어 7개월 정도 구류된다. 1928년에는 제3차조선공산당사건에 연루되어 40여 일 취조를 당한 후 방면되기도 하였다.
이후 경성에서조선일보사 정치부 기자로 일하면서,사설 카지노870;사설등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 3월부터는 이병조(李秉祚) 등과 함께 종합지 『대조(大潮)』의 발간을 주도하며, 5호(1930.8)까지 편집 겸 발행인을 역임한다. 『대조』가 통권 6호(1930.9)로 폐간된 이후에는 다시 조선일보사 상하이[上海] 특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중반 이후로는 다시 안악으로 낙향하여 창작 활동을 하는 동시에 여러 사회사업에 참여한다.
전무길은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에 남은 ‘재북작가’ 중 한 명이다. 북한에서단편소설「쓰레-트 공장」(1949),희곡『을지문덕장군』(1950) 등을 집필했다. 하지만 1950년 이후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전무길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부터 교내 문예지 『휘문』에 글을 싣는 등 일찍부터문학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1924년에는 고려공사(高麗公司)에서 첫 번째장편소설인 『설움의 빛』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무길의 본격적인 창작 활동은 1928년『중외일보』에 단편소설 「희생」을 발표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미로」(1929), 「소생」(1930),카지노사이트 추천D5C8;카지노사이트, 「역경」(1931), 「과도기」(1932), 「적멸」(1937), 「자괴」(1937), 「무한애」(1937) 등 총 20편 정도의 소설을 발표하였다.
전무길은KAPF등 사회주의 문학단체에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주의적인 계급의식에 기초하여 사회의 타락과 부패를 고발하는 소설을 주로 썼다. 특히 부도덕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여성의 타락과 희생은 그가 즐겨 다루었던 소재이다. 그의 소설은 구성에 문제가 있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지만, 동시에 당대 사회에 대한 냉혹하고 예리한 비판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점에서백철은 『신문학사조사』에서 그를 ‘폭로소설가’라고 부르며, 1930년대동반자작가의 일원으로 분류하였다.
한편 전무길은 소설 이외에도 여러 편의시조 · 시가와 비평을 발표했다. 특히 미국 문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 「아미리가(亞美利加)의 프로문학운동」(1934), 「미국소설가 점고(點考)」(1934) 등 그의 비평은 1930년대 미국문학의 소개와 이입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전무길의 작품 중 여성 교육자의 희생적 죽음을 그린 「무한애」의 경우 2003년에 북한의 문학예술출판사에서 간행된 『현대조선문학전집』 33권에 수록되는 등 중요한 작품으로 북한에서 인정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