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살 때 형홍다구(洪茶丘)를 따라 상경(上京)에서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를 만났는데, 세조가 스승이 될 선비를 선발해 그를 가르치게 하였다.
1266년(원종 7)에 세조의 명으로 고려인 300인을 호적에 올려 병사로 삼고 통솔하였으며, 1274년(원종 15)에는 남송정벌전(南宋征伐戰)을 수행카지노 추천 무략장군 중위친군천호(武略將軍中衛親軍千戸)로 승진하였고, 1278년(충렬왕 4)에는 강남의 민병(民兵)을 선발하는 일을 담당하고 명위장군 중위친군부도지휘사(明威將軍中衛親軍副都指揮使)로 승진하였다. 1280년(충렬왕 6) 소용대장군(昭勇大將軍)을 거쳐 1282년(충렬왕 8) 추밀원판관(樞密院判官)에 임명되었다. 1287년(충렬왕 13) 나얀[乃顔]의 반란이 발생카지노 추천 세조가 그를 친정(親征)하는 데 수행하고 돌아와 그 행차와 기거를 나누어 『동정록(東征錄)』을 만들었다. 1291년(충렬왕 17) 추밀원의 직책을 유지한 채 요양행성우승(遼陽行省右丞)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 집현대학사(集賢大學士)를 더하고, 다시 첨서추밀원사(僉書樞密院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성종(成宗) 대에 들어와 1305년(충렬왕 31)에는 중서우승(中書右丞)에 제배(除拜)되었다.
1290년(충렬왕 16) 11월, 세자였던충선왕(忠宣王)이 원의 수도 연경(燕京)에 갔을 때 당시 동첨추밀원사(同僉樞密院事)였던홍군상(洪君祥)의 집에 머물렀다. 1292년(충렬왕 18) 8월 세자가 황제를 알현하였을 때일본원정과 관련한 논의가 제기되어 황제가 일본정벌에 관하여 카지노 추천을 묻자, 홍군상은 고려에 물어본 후 시행할 것을 이야기하였다. 9월 첨서중추원사(簽書中樞院事)로서 일본인을 호송하는 일로 고려에 파견되어충렬왕(忠烈王)과 함께 일본정벌에 관카지노 추천 의논하고 돌아갔다.
1293년(충렬왕 19) 12월 충렬왕이 연경에 갔을 때 홍군상의 집에 머물렀다. 당시 충렬왕은 일본 원정 준비가 여의치 않음을 황제에게 고하고 그 준비를 늦추고자 하였는데, 1294년(충렬왕 20) 정월 원 세조가 훙서(薨逝)하자 홍군상이 승상(丞相) 울제이[完澤]에게 말카지노 추천 일본정벌을 취소하게 하였다.
아버지 홍복원이나 형 홍차구와 달리 여러 방면으로 고려에 이롭게 한 공으로, 1295년(충렬왕 21) 5월 삼한벽상공신삼중대광익성후(三韓壁上功臣三重大匡益城侯)에 봉카지노 추천지고, 같은 해 8월 도첨의중찬수문전태학사감수국사세자사임안공(都僉議中贊修文殿太學士監修國史世子師臨安公)에 개봉(改封)되었다. 그가 다른 형제들과 달리 고려에 위해를 가하지 않았던 것은, 그 형제들이 요양 지역을 주된 활동 영역으로 카지노 추천 고려와 이해관계가 상충하는 측면이 있었던 것에 비해 홍군상은 주로 중앙조정의 관직을 역임카지노 추천 고려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엮이지 않았다는 점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1309년(충선왕 복위 1)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