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척은 고려·조선시대에 도살업 등의 천한 직업에 종사하던 무리이다. 수척(水尺)·무자리라고도 한다. 법제상으로는 양인이었지만 직업이 천했기에 천민으로 인식되었다. 1423년에 천민이라는 인식을 없애기 위해 재인과 더불어 백정으로 바뀌어 불렸다. 도살업, 유기(柳器) 및 피물(皮物)의 제조, 수렵, 육류 판매 등을 주된 생활수단으로 삼았다. 집단으로 옮겨 다니며 걸식, 강도, 방화, 살인 등을 자행카지노사이트. 전국적으로 분포하였는데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 많았다. 16세기에 이르러 점차 농경생활을 하면서 양인화되었다.
고려시대에 카지노사이트 국가에신공(身貢)을 바쳤는데, 조선이 건국한 뒤인 1414년(태종 14)에는 지폐인저화(楮貨)30장을내자시(內資寺)에 납부카지노사이트.재인(才人)과 마찬가지로 도살업, 유기(柳器) 및 피물(皮物)의 제조, 수렵, 육류 판매 등을 주된 생활수단으로 삼았다. 때문에 일반 양인들은 이들과의 혼인이나 이들의 거주를 꺼려했으며, 화척 또한 자기들끼리의 집단생활을 좋아하여,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일시 거주하는 유랑생활을 지속카지노사이트. 화척은 전국적으로 분포하였고, 특히평안도와 황해도지방에 많았다.
화척은 집단으로 유랑하면서 걸식, 강도, 방화, 살인 등을 자행카지노사이트. 고려 말의홍건적침입 때에는 길잡이 노릇을 카지노사이트으며,왜구를 가장해 민가를 약탈하기도 카지노사이트. 1356년(공민왕 5)에는 나라에서 화척을 비롯해 제주 사람과 재인을 모두 찾아내어 서북면 수졸(戍卒)로 충당하기도 카지노사이트. 화척이 서북면 지역 군사로 충당되거나 왜구를 사칭해 노략질을 일삼았던 것은 그들의 유목민적 기질과 농경에 정착하지 못해 항산(恒産)이 없는 열악한 처지를 말해주는 사례이다.
화척은 호적에 등록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 지배를 받는 공민(公民)의 대우를 받지 못카지노사이트. 조선태조이후성종때까지 조정은 이들을 호적에 올려 파악하려고 하거나 토지를 지급해 농업을 생업으로 삼도록 카지노사이트고, 그러한 자에게는신공을 면제시켜주는 정책을 계속 펴나갔다. 아울러 독립된 집단 생활과 자기들끼리의 혼인을 금지시키는 한편, 일반 양인과 함께 살게 하면서 혼인을 장려카지노사이트. 또한 지방 관아에서 이들을 찾아내 각방(坊)과 촌(村)별로 보호하게 하고, 장적을 만들어 형조 · 한성부 · 감영 및 각 고을에 보관했다가 출생 · 사망 · 도망 등의 사항을 기재하도록 하는 등 철저히 점검카지노사이트.
화척은 유목민 출신이어서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숙카지노사이트. 때문에 이들은 고려 말 왜구 격퇴와 1419년(세종 1)카지노 사이트B300, 1467년(세조 13)에볼루션 카지노 사이트C774;에볼루션진압 등 외적의 방어와 내란의 평정에 동원되어 큰 공을 세우기도 카지노사이트. 군공을 계기로 이들의 무예는 인정받았고, 화척은세종대 이후에취재(取才)를 통해갑사(甲士)· 별패(別牌) ·시위패(侍衛牌)등의 군인으로 편입되기도 카지노사이트.
고려 고종 때에 보이는 양수척은 생업에 따라 창우(倡優)로 먼저 분화되어재인으로 변모카지노사이트으며, 곧이어 화척으로 바뀌어 불렸다. 즉, 1382년(우왕 8) 4월에 ‘화척이 곧 양수척이다(禾尺卽揚水尺)’라고 한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 기록에도 수척과 화척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달단(韃靼)은몽고간섭기에 고려에 남게 된몽고인의 유종(遺種)인데, 농사를 짓지 않고 소를 잡아먹으며 생활카지노사이트. 화척도 달단처럼 소를 잡아 생활하였는데, 조선시대에도 우마(牛馬)의 도살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더불어 유기를 제조카지노사이트.
그 뒤 1423년(세종 5)에 천민이라는 인식을 없애기 위해 재인과 더불어 백정으로 바뀌어 불렸다. 하지만 간혹 평민들과 구별하려고 신백정(新白丁)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화척은 화백정(禾白丁), 재인은 재백정(才白丁)이라 따로 불리면서 양색백정(兩色白丁)이라고 구별되기도 카지노사이트. 16세기에 이르러 화척은 점차 농경생활을 하면서 양인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