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석복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공산당 중앙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소련의 구역당기관에서 활약하다 1945년 김열, 허가이, 박창옥 등과 함께 3진으로 입북하였다. 북조선공산당 내에 소련파 세력을 형성한 중심인물로 당 중앙위원, 상무위원에 선출되었다. 당의 선전부문을 소련파가 도맡으면서 당기관지 『로동신문』, 『근로자』의 책임주필이 되었다. 카지노 파칭코 부상으로 기용되었으며 1954년 제네바회담 때는 대표자격으로 참가하였다. 김일성의 1인 독재정치 강화로 소련파에 대한 견제가 심해지면서 숙청을 당하였다. 소련으로 되돌아간 후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기석복은 1945년 12월 초에 소련의 구역당기관에서 활약하다 1945년에 해방이 되자 그 해 12월 초 3진으로 입북하여 이른바 ‘카지노 파칭코’ 세력을 형성하는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는 북로당 활동에 있어서 실력을 발휘하여 북로당 제2차 당대회에서 당 중앙위원과 상무위원으로 피선되었다. 그는 특히 언론·문예 영역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여 당기관지 『로동신문』, 『근로자』의 책임주필이 되었으며, 1948년 9월 9일 정권 수립 시에는 차관급에 해당하는 카지노 파칭코 부상으로 기용되었다. 또한 평론가로서 작가동맹중앙위원회에도 속했다. 그러나 김일성의 1인 독재정치 강화로 소련파에 대한 견제가 심화되면서 그는 카지노 파칭코 부상, 당중앙위원 등 모든 공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숙청 후 이중국적자인 그는 소련으로 되돌아갔다.
기석복은 1945년 12월 초에 소련의 구역당기관 및 행정 분야에 근무했던 조선인 그룹 허가이(許哥而), 방학세(方學世), 박의완, 강상호(姜尙昊), 김열, 김승화, 김택영, 김찬(金燦) 등과 함께 3진으로 입북하였다. 이들은 제1진, 2진보다 비중이 높고, 소군정에 의해 정치적 역할이 기대되었기 때문에, 북조선공산당 내에 이른바 카지노 파칭코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석복은 당내 비중이 커지면서 1946년에는 평양학원에서 당증 수여사업을 위해 구성된 반(班)심사위원회 위원장으로 발탁되기도 했다. 1948년 3월 27일부터 30일까지 열린 북조선로동당 제2차 대회에서는 카지노 파칭코가 당 중앙위원 16명과 후보위원 3명으로 대폭 증가, 당내 헤게모니를 쥐게 되었는데, 이때 기석복은 카지노 파칭코의 일원으로서 허가이, 박창옥, 김재욱, 김열, 한일무, 이희준, 김승화, 태성수, 박창식, 이동화, 방학세, 김영수, 장철, 박영성, 김찬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아울러 그는 카지노 파칭코 허가이, 박창옥, 김재욱 등과 함께 15명으로 구성된 상무위원에 속하게 된다. 당시 카지노 파칭코는 당의 선전부문을 도맡았는데, 박창옥이 연안계의 김창만이 맡고 있던 선전선동부장직을 차지하였고, 이때 기석복은 당기관지 『로동신문』, 『근로자』의 책임주필이 되었다.
기석복은 1948년 9월 9일 정권 수립 시에는 차관급에 해당하는 카지노 파칭코 부상으로 기용되었다. 당시 문화선전상은 연안계 허정숙이 맡았다. 기석복은 또한 1954년 4월에 개최된 제네바정치회담에 남일 외무상, 백남운과 함께 대표자격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의 개입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리고 소련파에 대한 경고로 1955년 12월 28일 당 선전선동 일꾼들 앞에서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 주제의 연설을 행하면서, 소련파의 대표인물인 박영빈(당정치위원, 조직부장), 박창옥(부수상 겸 국가계획위원장, 당 정치위원), 기석복(『로동신문』편집인)의 오류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이후 기석복은 정률과 함께 카지노 파칭코 부상에서 해임되었으며, 1956년 4월 제3차 당대회에서는 당중앙위원 명단에서 탈락되고 말았다. 김일성에 의해 숙청을 당한 기석복은 소련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그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