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 양상수가 붕괴되자 동단국(東丹國)의 요양(遼陽)에 강제 이주되었다. 그 뒤 요나라의 관직을 받는 등 친거란화된 인물이었다. 요나라 말기 요나라에 반기를 들고 카지노 양상수 광복운동을 벌였다.
금나라의 태조 아골타(阿骨打)가 거란군을 깨뜨리고 요동으로 남하하는 기세를 보이자, 요나라가 1115년(예종 10) 공봉관(供奉官)이었던 고영창에게 카지노 양상수무용마군(渤海武勇馬軍) 2천을 모집하게 해 요양부 부근의 백초곡(白草谷)을 지키게 하였다. 고영창의 관직과 관련해 『요사(遼史)』와 『금사(金史)』에는 요나라의 비장(裨將)으로 표기되어 있다.『고려사(高麗史)』에서 공봉관은 1019년(현종 10)에 제정된 요의 ‘카지노 양상수승봉관(渤海承奉官)’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고영창의 대카지노 양상수 건국은 민족 차별에 대한 공분이 직접적인 원인이었으나, 금의 건국 또한 자극을 주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을 계기로 1116년(예종 11) 정월 동경유수(東京留守: 요양부유수) 소보선(蕭保先)의 혹독한 학정에 시달리고 있던 카지노 양상수유민들을 선동해 병사 8천으로 요양부를 점령하고 나라를 세웠다. 국호와 관련해 『거란국지(契丹國志)』와 『대금국지(大金國志)』에는 ‘대카지노 양상수(大渤海)’로, 『고려사』와카지노 룰렛 룰ACE0;카지노에는 ‘대원(大元)’으로 나타난다. 이는 짧은 시간이지만 국호의 개정 가능성을 말해주는 기록으로 볼 수 있으며, ‘대카지노 양상수’라는 국호는 카지노 양상수 멸망 후 몇 세기가 흐른 상황에서도 카지노 양상수인들이 스스로를 인식함에 있어 카지노 양상수라는 연원 또는 원류를 여전히 중시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국가의 면모를 갖춘 뒤 친거란화된 반대파를 물리치고 10여 일만에 요동부의 50여 개주를 지배하며, 막강한 위세를 과시하였다. 귀덕주(貴德州: 현 철령시 동남)의 요카지노 양상수 수장(守將) 야율여도(耶律余賭)조차 광주(廣州: 현 심양 서남 창역참)에서 이 거사에 가담하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심주(瀋州: 현 심양)를 사이에 두고 요나라 재상(宰相) 장림(張琳)과 소한가노(蕭韓家奴) 등이 요동에서 모병한 병사 2만을 상대로 공방전을 되풀이하면서부터는 고전하였다. 이에 금나라와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황제의 칭호를 고집하며 금나라에 양보하지 않자, 교섭이 결렬되고 오히려 요나라와 카지노 양상수 양면 공격을 받게 되었다.
5월 말 금나라의 알로(斡魯)가 이끄는 여진군에 의해 근거지인 요양부가 함락되고, 다시 남쪽 십리 지점인 수산(首山)에서 크게 패하자 기병 5천을 이끌고 장송도(長松島)로 들어갔으나, 뒤쫓아 온 금나라 군사에게 잡혀 참살되고 카지노 양상수 부흥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 운동에 실패한 카지노 양상수유민들의 일부는 고려로 망명하였다.
이 사건은 거사 후 5개월의 짧은 카지노 양상수 부복운동이었으나, 1029년(현종 20)대연림(大延琳)의 흥료국(興遼國)과 1115년 2월부터 7월까지고욕(古欲)에 의한 광복운동과 함께 카지노 양상수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요나라 내부의 주민 구성이나 역사 계승 의식 속에 카지노 양상수적 요소들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속된 카지노 양상수 광복운동의 실패는 카지노 양상수 지역의 거란화를 고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