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초명은 박경작(朴景綽)이며, 자(字)는 영유(令裕)이다. 할아버지는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지낸 박충후(朴忠厚)이고, 아버지는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박인량(朴寅亮)이다. 아들로 박효렴(朴孝廉)과 박효선(朴孝先)이 있다.
어렸을 때부터 널리 경서(經書)와 전적(典籍)에 통달하였고, 문장에 뛰어나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진사(進士)에 응시카지노 바카라 급제하였다. 급제한 뒤 주로 간쟁(諫諍)과 문한(文翰)의 직을 맡았다.
1107년(예종 2)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한즉유(韓卽由) 등을 선발하였다.
1108년(예종 3)병마부사(兵馬副使)로서윤관(尹瓘)을 따라 여진정벌군에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주(定州)에 머무르고 있을 때 윤관이 9성을 쌓는다는 말을 듣고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하고, 또 전중감(殿中監) 직문하(直門下)로서 송나라와의 국교를 재개하려는 것을 중지시켰다.
1113년(예종 8)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1115년(예종 10)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어 떠날 때 예종(睿宗)은 ‘경인(景仁)’이라는 이름과 함께 차와 약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이름을 ‘경인’이라 개명하였다.
이듬해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로청연각(淸讌閣)에서『서경(書經)』을 강하였으며, 김연(金緣) 등 여러 학사들과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주석하였다. 형부·이부·호부·예부의 상서(尙書)를 거쳐 1119년(예종 14) 지추밀원사에 오르고 나중에는 수사공(守司空) 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 참지정사가 되었다.
1121년(예종 16) 소신사(燒身寺)에서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