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시전상인(市廛商人) 출신이다.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그의 집안은 적어도 100여 년쯤은 장사를 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업인 선전(縇墮)을 물려받은 그는 모험심이 강한 상인으로서 1880년대에 백윤수상점으로 상호를 바꾸고 본격적인 상업활동을 전개하였다. 상점의 위치는 서울 종로 화신 쪽에서 안국동 방면이었으며, 인천 개항 이후 청상(淸商)들이 몰려오자 그들과 직접 무역을 하였다.
종로의 시전은 18세기 후 객주(客主)·도가(都家)의 서울 진출로 이미 독점권을 상실했고, 개항 후 유럽제품의 유입으로 일본과 청나라 상인이 진출하자 더욱 타격을 받았다. 특히, 갑오개혁 후 성세(盛勢)가 급락하였으며 일본인 재정고문이 화폐개혁을 단행하면서 결정적인 몰락의 길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백윤수상점은 청나라 비단을 독점수입 판매하면서, 더욱이 무늬와 색상을 기호에 맞게 주문생산카지노사이트 판매함으로써 인기를 독점할 수 있었고, 서울 장안의 귀족·고관·지주 등 돈 많은 사람들을 고객으로 확보카지노사이트 경영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당시 한성은행의 자본금이 100만 원이었는데, 그의 재산은 300만 원이었다. 1916년 대창무역주식회사(大昌貿易株式會社)를 설립카지노사이트 전통적 시전상인의 구각을 탈피하고 근대적 기업가로 변신하였다.
주주는 거의 모두 가족으로 구성되었으며, 물품을 수입, 시판카지노사이트 판매권을 장악하였고 직물가공부를 병설카지노사이트 상품의 생산 및 가공판매를 도모카지노사이트 견직물과 마포 등을 생산, 판매하였다. 1920년 이후 국산 견직물 생산을 위해 직물가공부를 분리시켜 대창직물주식회사를 창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