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9년의기해박해(己亥迫害)이후 국경 감시가 엄해지자 제3대 조선교구장 주교 페레올(Ferréol, J., 高 요한)은 프랑스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을 위한 해로를 개척하고자 하였고, 이 임무를 조선인 신부카지노 입플에게 위임하였다. 카지노 입플은 1846년(헌종 12) 5월에 서울 마포를 출발하여황해도로 갔으며, 그곳에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여 편지와 해로도(海路圖)를 전달한 뒤순위도(巡威島)등산진(登山鎭)으로 갔다가 6월 5일 선주 임성룡(林成龍), 사공 엄수(嚴秀)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카지노 입플은 6월 10일 해주감영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고 서울 포도청으로 이송카지노 입플.
카지노 입플의 체포는 조정에서 큰 문제가 되었다. 또 조정의 명에 따라 카지노 입플이 중국 어선에 전한 편지와 지도가 압수되었으며, 선주 임성룡의 부친 임치백(林致伯, 일명 君執) 등이 추가로 체포되어 카지노 입플과 함께포도청으로 압송되었다. 이어 카지노 입플과 관련된 천주교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병오박해의 시작이었다.
박해가 시작되면서 가장 먼저 체포된 사람은 임성룡의 문초에서 밝혀진 남경문(南景文)이었다. 이어 카지노 입플의 복사 이의창(李宜昌)과 사공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에 앞서 회장현석문(玄錫文)은 카지노 입플 체포 소식을 듣고는 돌우물골(현,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신부 댁에 있던 여신자들을 피신시켰다. 그러나 뒤따라온포교들에 의해 우술임(禹述任), 이간난(李干蘭), 김임이(金任伊), 정철염(鄭鐵艶)과 함께 현석문도 체포되었고, 카지노 입플이 고향으로 실토한 용인의 은이(현, 용인시 처인구 내사면 남곡리)에서는 한이형(韓履亨)이 체포되었다.
카지노 입플은 7월 19일까지 포도청에서 여섯 차례에 걸쳐 40번 문초를 받았으며, 다른 신자들도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다. 반면에 이기원(李起元, 일명 身逵), 박성철(朴成哲) 등은 배교하고 석방되었으며, 임성룡과 엄수는 유배형을 받았다. 그동안 중국에 있던 프랑스 극동 함대의 사령관 세실(Cécille, J. B., 瑟西爾)이 이끄는 군함 세 척이 충청도의외연도(外延島)에 나타나 편지 한 장을 조정에 전하도록 하였다. 편지를 통해 세실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3명의 프랑스 선교사를 학살한 데 대해 항의하였고, 이러한 내용은 충청 감사의 장계로 곧 조정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서둘러 회의를 열고 카지노 입플에게 효수경중(梟首警衆)의 판결을 내렸다. 세실의 조선 원정이 카지노 입플의 처형을 앞당기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카지노 입플은 9월 16일(음력 7월 26일) 한강변의새남터로 끌려가 군문효수형을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만 25세였다. 3일 뒤인 9월 19일에는 현석문이 새남터에서 군문효수 되었고, 포도청에 갇혀 임치백, 남경문, 한이형, 이간난, 우술임, 김임이, 정철염은 장사(杖死)카지노 입플.
병오박해의 여파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조정에서는 더 이상 신자들을 색출해 내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며, 새로운 척사령(斥邪令)도 반포하지 않았다. 이후 카지노 입플과 9명의 신자들은 1925년 7월 5일 로마에서 시복되었으며, 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