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위신편(闢衛新編)』은 7권 5책으로 구성된 필사본이다.
카지노 입플C724;카지노 입플C885는 관직에 나가기 전인 1848년에 『벽위신편』 집필을 완료한 뒤, 관여(盥如) 이정관(李正觀)의 서문을 받아 초고본을 완성하였다. 그런 다음 환재(瓛齋)박규수(朴珪壽)에게서 평을 받고 1854년(철종 5)까지 초고본을 개정했으며, 1880년대 초까지 계속 새로운 자료를 보완했으니, 이것이 바로 현행본 7권 5책(필사본)이다.
『벽위신편』을 저술한 첫 번째 목적은천주교가 널리 전파되어 유학을 침식하는 것을 막는 데 있다. 두 번째 목적은 해방(海防)을 강화함으로써 서양 세력의 침입을 방어하는 어양책(禦洋策)을 제시하려는 데 있다.
책의 토스 카지노은 초고본과 현행본에 차이가 있는데, 초고본에 있던 권1의 「이교인기(夷敎因起)」가 현행본에는 누락되는 대신 권4의 「연해형승(沿海形勝)」이 상 · 하로 확대되었다. 척사보다는 해방에 더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현행본은 권1 「제가논변(諸家論辨)」, 권2 「이국전기(異國傳記)」, 권3 「연해형승」 상(중국편), 권4 「연해형승」 하(조선편), 권5 「정리전도(程里躔度)」, 권6 「비어초략(備禦鈔略)」, 권7 「사비시말(査匪始末)」의 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울러 앞부분에는 자서와 이정관의 서문을 수록하였고, 후반부에는 총설에 이어 박규수의 평과 지운호(池運浩)의 발문을 첨부하였다.
권1 「제가논변」에서는 청나라 학자들의 척사론을 비롯하여 해방론과 제이책(制夷策)을 통해 천주교의 중국 전파 과정과 배척의 논리, 마카오의 통제책과 어양책을 소개하였다. 이어안정복(安鼎福), 이정관 등조선학자들의 척사론을 소개하였으며, 위원(魏源)의 해방론, 양광선(楊光先)의 「벽사론(闢邪論)」 등을 보완하였다.
권2 「이국전기」는 청대의 『문헌통고(文獻通考)』, 『명사(明史)』, 『경세문편(經世文編)』 등을 바탕으로 서양과 중국 인근 나라들을 설명한 인문 지리적인 토스 카지노이다. 이후 미흡한 부분을 위원의 『해국도지(海國圖志)』, 서계여(徐繼畬)의 『영환지략(瀛環志略)』, 고염무(顧炎武)의 『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를 통해 보완 설명하였다.
권3 「연해형승」(상)에는 「사해총도(四海總圖)」와 중국의 「연해전도(沿海全圖)」, 「대만도(臺灣圖)」 등을 수록하고, 진륜형(陳倫炯)의 『해국견문록(海國見聞錄)』을 토대로 천하의 연안 형세를 설명하였다.
권4 「연해형승」(하)에는 8도 연해 군현도, 조선 서해안과 중국 동해안과 유구(琉球)의 경계를 표시한 「삼계도(三界圖)」 상 · 하, 그리고 조선의 「연해전도」가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49개 조목에 달하는 연안 지형 토스 카지노, 1482년 이래의 해방 관련 사건들이 첨부되었다.
권5 「정리전도」는 세계 인문 지리학 또는 역사 지리학적 설명으로, 그 끝에는 박규수의 「지세의명(地勢儀銘)」이 첨부되어 있다.
권6 「비어초략」에서는 청의 문사들이 제시한 해방 이론을 바탕으로 해안의 군사 조직과 방어 시설 축조, 서양의 무기 · 병선의 제작과 방법 등을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을 통해 해방책을 보완하였다.
권7 「사비시말」은 1644년(인조 22)부터 1866년(고종 3)의병인박해때까지 서양과의 접촉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부분이다.
윤종의는 사교(邪敎)인 천주교의 전파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유학의 참된 도리를 밝히고[明吾道], 천주교에 물든 사람들의 마음을 고치는 것이 최상의 방법[革心爲上]이라고 생각하였다. 아울러 천주교와 서양 세력을 막는 4가지 방책을 제시하였다. 즉, 정학을 일으키고 사교를 토멸하며[正學興 息邪說], 본업에 힘쓰고 이익만을 탐하는 것을 천하게 여기며[務本業 賤末利], 위로는 인륜을 밝히고 아래로는 백성과 친화하며[人倫明於上 小民親於下], 나라의 방위를 엄하게 하고 미리 방비해야 한다[嚴禁防 豫備禦]는 것이다. 이와 함께 연해의 수령을 신중하게 가려 발탁하고[沿海守令 當愼擇], 서양의 기술과 우수함을 배워야 한다[師夷長技]고 주장하였다.
『벽위신편』에 나타난 척사론과 해방론은 서양 세력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지식인들에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또한 천주교와 서양 세력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이해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 교리의 불합리성을 밝히는 데 급급했던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가 있고, 서양의 새로운 지리관이나 기술의 우수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문명 개화의 이론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는 단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