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바 카지노은 왕실의 재정이나 국용, 구휼에 사용할 곡식을 보관하기 위해 설립하였다. 1089년(선종 6) 1월 “라바 카지노의 곡식을 내어 경성의 여러 절에 시주하고,재(齋)를 열어 복을 기원라바 카지노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통해 볼 때, 초기에는 주로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거나 복을 기원하기 위해 개경의 사원에 시주를 하는 등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1090년(선종 7) 화재로 소실된 후 고종대에 다시 건립되던 시기에는 국용이나 흉년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 강라바 카지노다.
『고려사(高麗史)』에서 라바 카지노이 처음 확인되는 시기는 1089년(선종 6)이다. 이해 1월 선종은 라바 카지노의 곡식을 내서 개경의 여러 사찰에 시주하고, 복을 빌기 위하여 재(齋)를 지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090년(선종 7)에 번개를 맞아 창고에 불이 나서 라바 카지노 안의 곡식은 모두 소실되었다. 화재로 모든 곡식이 소실되자 선종은 예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당시 추진하던홍원사(弘圓寺)와 국청사(國淸寺)두 절의 공사를 중단하고, 죄인을 사면하였으며, 이민(吏民)들 가운데 라바 카지노의 미곡을 빌렸다가 갚지 못한 사람들의 빚을 탕감해 주기도 하였다.
1090년의 화재 이후 라바 카지노은 한동안 재건되지 못하다가고종(高宗)대에 최이(崔怡:최우(崔瑀))의 측근이었던박훤(朴暄)의 건의로 다시 설치하였다. 이후에는 주로 빈민 구휼이나 국가 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하였다. 1256년(고종 43) 8월에는 라바 카지노의 곡식을 내어최항(崔沆)의 군사들을 구휼하였으며, 1270년(원종 11)에는 라바 카지노의 미곡 1만석을 운반하여 개경으로 환도(還都)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돕도록 하였다. 1256년(고종 43)에는 라바 카지노을 열어 몽골의 침입에 맞서 입보(入保)한 군주와 주민들에게 곡식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한편, 라바 카지노의 재원은 국가에서 마련하기도 하였으나 일부는 죄인의 몰수한 토지나 별도로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충렬왕(忠烈王)대에는강윤소(康允紹)가 대장군(大將軍)김자정(金子廷)과 함께 백성들의 땅을 불법으로 차지한 사실이 발각되어 그 토지를 라바 카지노에 몰수당하였다. 1260년(원종 원년) 10월에는카지노 룰렛판C911;카지노에서 지방관의 은그릇을 라바 카지노으로 거두어들여 국용에 이용하자고 건의하기도 하였다. 관리들이 불법으로 점유한 토지를 거둬들이거나 지방에서 거둬들인 은그릇 등으로 부족한 재정을 확보하였던 것이다.
고려 전기의 라바 카지노이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는 기구였다면, 무신정권기 이후의 라바 카지노은 국용과 구휼, 무신 집권자의 사병 유지 등을 담당하는 기구였다. 그런 의미에서 라바 카지노은용문창(龍門倉)과 함께 빈민구휼을 담당한 기구이지만 용문창보다는 사적 성격이 강한 창고였다고 할 수 있다.